[프레시안]복지 전쟁! 진짜 싸움터는 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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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낙산사복지재단 댓글 0건 조회 3,822회 작성일 12-02-06 06:20본문
복지 전쟁! 진짜 싸움터는 회사다!
[프레시안 books] <지금 복지 국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기사입력 2012-02-03 오후 6:10:14
대표적인 복지 국가 노르웨이의 노동 운동가 아스비에른 발(Asbjørn Wahl)이 낸 책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지금 복지 국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신자유주의 시대, 복지 정책의 딜레마>(남인복 옮김). 영어판 제목은 "복지 국가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Welfare State)".
저자가 노르웨이 어로 쓴 글을 영어로 옮겨 영국의 플루토 출판사에서 책이 나온 게 2011년 12월인데, 한국어 판이 1월에 나왔다! 번역가와 출판사의 재빠름이 놀랍다.
개인과 집단, 자유와 평등은 대립한다?
제목은 밋밋한데, 책이 말하는 바는 명쾌하다. 복지 국가는 자본과 노동의 권력 관계의 역사적 산물이며, 그 미래도 계급 투쟁의 권력 관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개인을 집단과 대립하는 존재로, 자유를 평등과 대립하는 가치로 보는" 자유주의자들은 틀렸으며, "자유와 평등은 같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복지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변화는 정부나 의회에 기대할 수 없기에 노동조합과 사회 운동이 앞장서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필수적이다.
복지 국가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계급 타협의 산물이며 '운동(movement)' 없는 복지 국가는 상상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이 책을 가로지른다. 복지 국가가 "공공 예산의 총액"을 늘리면 저절로 만들어지는, 관료와 정치 엘리트가 주도하고 집행하는 정책이나 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복지 국가는 "사회 제도와 공공 예산과 사회적 혜택의 총합"이 아니라 계급 투쟁과 권력 관계의 산물이라는 지적은 복지 국가가 "정책과 돈의 문제"라고 착각하는 한국의 정당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살짝 언급되는 정도지만, "엘리트의 반란", "부자들의 혁명"을 통해 복지 국가를 "학살"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신자유주의의 정치경제학적 핵심, 즉 노동가치설의 부정과 폐기에 대한 지적도 날카롭다.
"(부동산·금융·증권 시장의 투기꾼들이) 조선소의 용접공과 석유 산업의 엔지니어, 자동차 산업의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똑같이 가치를 창출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노동 운동이 처음 전개될 때 사람들은 학습 모임을 통해 사회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고 배웠다. 바로 노동이었다. 이른바 '불로소득'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 투기꾼들이 창출하는 가치는 없는 게 차라리 낫다."
사회주의 없었다면 복지 국가가 가능했을까?
정책과 제도를 뛰어넘어 역사와 대립의 산물로서 복지 국가를 바라볼 때, 저자가 이념과 현실 모두에서 사회주의가 복지 국가의 탄생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20세기 초 나라 안에서 노동 계급이 급진화·과격화하고, 나라 밖으로 러시아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깃발이 휘날리게 되자 자본가 계급은 타협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노동 운동의 원래 목표는 "착취와 억압이 없는 자유의 사회, 사회주의 사회"였다. 노동 운동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전 단계로서 복지 국가를 상정했던데 반해,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의 물결을 저지하려" 복지 국가에 타협했던 것이다.
외부적으로 자본가들이 보편적인 복지 국가를 받아들인 데에는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진영과의 체제 경쟁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국제연맹 산하 기관으로 노사정 3자 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가 출범한 때가 1919년이었다. 1917년 성공한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혁명의 물결이 세계 곳곳에 출렁이던 때였다. ILO가 출범하자마자 제정한 첫 국제 협약이 (21세기 한국에서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하루 8시간 노동" 협약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회주의 혁명의 압력 속에 국제 표준이 된 8시간 노동제처럼,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존재했기 때문에 복지 국가는 유럽을 넘어 미국에까지 그 흔적을 뚜렷이 남길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린 1989년을 기점으로 복지 국가 역시 타격을 받기 시작했음을 상기할 때, 이념과 현실로서의 사회주의가 복지 국가의 형성과 발달,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출발점,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
책을 읽다보면, 신자유주의라는 자본가들의 경제적 공세가 노동 계급에 대한 정치적 공격, 즉 노동조합에 대한 체계적 파괴로 격발되었음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미국 CIA와 칠레 군부의 음모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1973년 칠레의 군사 쿠데타가 출발점이었다. 우익 쿠데타 이후 노동 운동이 거세된 칠레는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운 관료, 지식인을 일컫는 '시카고학파'의 실험장으로 전락했다.
1981년 미국의 항공 관제사들이 벌인 파업에 대한 레이건 정부의 공격과 1984년 영국의 광업 구조 조정에 대항해 투쟁했던 광산노조에 대한 대처 정부의 공격이 국가 권력과 자본가들의 승리로 돌아감으로써 지금은 우리 귀에 익숙해진 세계화, 시장 근본주의, 금융화, 민영화, 규제 철폐, 구조 조정, 통화와 자본 통제의 포기, 수입 제한 철폐, 수출 지향 전략 채택,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노동 시장 유연화, 신자유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개별 국가와 세계 정치를 주무르게 되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나라에서 노동조합 조직률이 하락했고, 당연하게도 국민 총소득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졌다. 한국도 예외는 아닌데 1989년 19퍼센트에 육박했던 노동조합 조직률이 2010년에 1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고, 국민 소득에서 노동 소득이 차지하는 비중도 하락했다. 199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친 노동 시장 유연화는 노동자의 부를 자본가의 수중에 "재분배"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의 파괴와 '제3의 길'의 종언
복지 국가를 "학살"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파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정치적 규제의 철폐, 즉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 필연적이었다. "규제 철폐와 민영화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정치적 통제를 벗어나려는 흐름"과 세계무역기구(WTO)나 FTA처럼 "초국가적 합의와 제도를 통해 국민의 정치적 통제를 우회하려는 흐름"이 대표적이다.
복지 국가의 두 기둥인 노동 운동과 민주주의(사회 경제 활동에 대한 정치적 규제)가 퇴조하면서 자본 통제, 투자 정책, 조세 정책, 건강 정책, 교육 정책, 노동 조건의 결정권이 정치 체제로부터 시장, 즉 자본가들에게 넘어갔다.
지구적으로(globally) 권력 지형이 자본가들에게 유리하게 바뀌면서 노동과 자본 사이에 이뤄졌던 역사적인 계급 타협은 폐기되었다. 나라별로 차이는 있지만 서유럽에서 동남아시아까지 세계 곳곳에서 복지 제도는 약화되었고, 노동 계급의 연대를 가능케 했던 전국 수준의 단체 교섭은 붕괴했으며, 공장과 사무실에서 보장되던 노동자들의 권리는 악화되었다. 이러한 지구적 반(反) 혁명의 주인공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권을 맘껏 향유했던 독점 자본, 즉 초국적 기업들이었다.
이로서 모델로서의 사회적 대화와 사회적 파트너십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조절 자본주의(coordinated capitalism) 하에서 계급 타협을 관리하는 체제로서의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역할이 끝장난 것이다. 그 결과 "지난 20년 동안 규제 철폐와 민영화 그리고 공공 복지 서비스에 대한 공격에 동조했던"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이나 독일 사회민주당의 '새로운 중도'같은 사회민주주의 우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분배 관계가 아닌 생산 관계
그렇다면, 복지 국가는 실패한 것이고 폐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의 입장은 그 반대다. 복지 국가는 강화되어야 한다.
1990년대 이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복지 국가를 친(親) 시장의 방식으로 변형시키려 했다면, 지금부터의 복지 국가는 탈(脫) 시장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시장의 영역으로 넘어간 복지 제도들을 다시 시장 밖으로 끌어내야 하며, 규제를 받지 않아 고삐가 풀린 시장을 다시금 강력히 규제해야 한다. 나아가 금융 자본주의가 낳은 투기의 물결을 제거하기 위한 반격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현존하는) 사회 시스템의 대부분을 그대로 둔 가운데" 해결책을 찾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선거로 정부가 바뀌더라도 훼손되지 않도록 "평등을 사회의 제도적 구조 안에 녹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선거에서의 승리나 법제도의 개혁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본가가 장악하고 있는 생산 시스템, 즉 생산 관계의 영역을 노동자들이 탈환해야 한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 즉 경제 민주화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보기에 그 목표는 작업장 민주주의(workplace democracy)의 확립이어야 한다. 쉽게 말해, 공장과 사무실 밖에만 존재하는 민주주의를 공장과 사무실 안으로 확장해야 한다. "직장의 권력 관계를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권력을 얻으려는 투쟁에 실패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복지 국가는 '사회적 수선소'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 생산 시스템이 부의 최고 원천이며 또한 분배의 불평등의 원천이기도 하다. 경제 생활을 민주화할 길들을 가능한 한 많이 모색해야 한다. (…) 권력 관계가 형성되는 곳은 생산이지 소비가 아니다."
복지 국가 운동을 위한 사회적 동맹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 운동가답게 저자는 노동 운동의 활성화와 정치화를 제안한다.
"노동조합들이 더욱 독립적이고 공격적인 정치적 역할을 채택해야 한다. (…) (이는) 정당과 연결된 정치적 역할이어서는 안 되며, 사회적 투쟁에서 보다 포괄적인 임무를 떠안는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이어야 한다."
"복지 국가 운동"을 위해 농민, 학생, 여성, 은퇴자, 복지 수혜자들을 지지하는 다양한 조직이 참여하는 사회적 동맹을 노동조합 운동이 주도해야 한다. 저자에 따르면, 노르웨이에는 노동조합들이 선거 때 한 개 이상의 정당을 지지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선거 때 노동조합의 필요와 조합원들의 요구를 바탕으로 선거 공약을 정당들에게 제시하고, 그 이행을 약속하는 정당 혹은 정당들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을 통해 2005년 노동당이 주도하고 좌파 성향이 더 강한 사회주의좌파당이 참여하는 적록(赤綠) 연정이 출범할 수 있었다. 정권 교체로 우익 정권이 개악시켰던 노동법이 다시 개선되고, 우익의 사립학교법이 폐지되고, 철도 민영화가 중단되었다. 그리고 노르웨이 정부는 WTO에서 서비스 분야의 자유화 요구를 철회했다.
뻔한 이야기지만 대안은 기본에 있고, 현장에 있다. 우리가 일하며 살고 있는 현장에서 운동을 강화해야 한다. 일터와 지역 사회에서 운동을 활성화시켜야 하며, 전국 수준의 운동과 국제 연대도 바로 세워야 한다. 물론 여기서 운동은 노동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운동이다.
대안은 많다
답은 결국 사람에 있다. 자본가들은 사람들이 서로를 불신하고 경쟁하게 만들지만, 운동은 서로를 믿고 협력하게 만든다. 자본가들은 "모두가 부자가 되는 사회"를 약속하지만, 운동은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약속한다. 운동의 위기는 이데올로기의 위기이기도 한데, 이는 노동운동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는 사상적 토대를 상실했음을 뜻한다.
저자는 "위기와 사회의 퇴보에 맞선 투쟁에 영감을 불어넣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대안적인 사회 발전의 비전을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대안의 부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꼬집는다. 대안은 많다는 것이다.
"민영화의 대안은 민영화를 하지 않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의 대안은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관료주의와 위로부터의 통제에 대한 대안은 민주화와 아래로부터의 참여이다. 점점 심화되는 불평등과 빈곤에 대한 대안은 재분배와 누진세, 보편적인 무료 복지 혜택이다. 파괴적인 투기 경제에 대한 대안은 은행과 신용 기관의 국영화, 자본 통제, 의심스런 금융 상품들의 거래 금지다. 이런 식으로 리스트를 만든다면 (대안의 리스트는) 아마 끝이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무너져 내리는 지금 시점에서 대안 문제보다 시급한 문제는 "대중의 동원을 실현하고 또 이런 정책들의 실천에 필요한 수단들을 이용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을 갖추는 것인데, 저자가 보기에 그 출발은 "노동조합의 대중 동원 능력을 약화시킨" '사회적 대화', 즉 사회 협력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서 "(노동조합이) 동원 능력을 갖추고 (…) 투쟁에서 새로운 노선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나아가 노동 운동은 생산의 결과물, 즉 소비와 분배에만 초점을 맞추어온 기존의 노선을 권력 관계가 형성되고 결정되는 생산의 영역으로 옮겨야 한다. "권력 관계를 공격하지 않는 한, '살찐 고양이들'의 터무니없이 높은 연봉을 비난하고 절제를 호소해봐야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소비자로서의 이해관계"를 넘어 "생산자로서의 이해관계"를 따지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
생산 관계, 즉 현장(workplace)의 권력을 둘러싼 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는 지적은 복지 국가를 고민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각하게 고민할 대목이다. 일터의 권력 관계, 즉 작업장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 없는 복지 국가는 모래성 위에 쌓은 집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공공 재정의 총액", "정규직 임금의 몇 십 퍼센트"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지금의 복지 국가 논의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새로운 영감을 찾는 논객과 정책 담당자를 위한 필독서"
영어 판을 직접 구해보진 않았지만, 우리말로 옮긴 남인복의 번역도 훌륭하다. 하지만, 노동 문제에 대한 경험 부족이 주는 한계가 간혹 보인다. 법률 용어인 '근로자'를 고집하는 게 대표적이다. 근로 운동이나 근로조합이라 하지 않고 노동 운동과 노동조합이라고 하듯이 노동자로 고쳐 쓰는 게 맞다. 참고로 고용주(employer)의 법률 용어는 '사용자'다.
ILO의 핵심 목표인 '좋은 일자리(decent work)'도 '일다운 일'로 동어반복으로 번역되었다. 고용노동부는 '양질의 노동'이라고 한자말을 쓰는데, 나는 '좋은 일자리'라는 우리말 표현을 더 좋아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양질의 노동'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는 잘하는 것이라 본다.
복지 국가 연구의 대가인 에스핑-안데르센(Esping-Andersen)을 "에스핑과 안데르센"이라고 두 사람으로 나눠버린 것도 옥의 티다. 에스핑-안데르센은 1990년 나온 <복지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The Three Worlds of Welfare Capitalism)>에서 복지 국가를 △자유주의 모델, △국가-코포라티즘 모델, △사회민주주의 모델로 나눈 복지 국가 이론의 대가다.
물론 이런 사소한 번역상의 문제들이 책을 읽고 그 핵심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점은 글머리에서도 지적했지만 한국어 판 책 제목과 표지 편집이 너무 밋밋하다는 것이다. 좀 더 강한 표현의 제목에 강렬한 색깔의 표지였다면 어땠을까.
책 표지 뒷면에 붙은 우리말 설명은 책 내용 가운데 미국 복지 제도의 문제점을 그대로 따온 것인데, 책의 핵심을 전하는 내용이 아니라서 아쉽다. 플루토 출판사의 영어 판 뒷 표지에 실려 있는 네 개의 추천사를 그대로 실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그 중 책에서 언급되는 노동 운동 조직인 국제공공서비스노동조합연맹(PSI) 사무총장 페터 발도르프의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복지 국가의 미래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현재의 논쟁에 대한 중요한 기여. 발은 사회의 권력 관계가 어떻게 변해왔으며, 그것이 불평등을 확대시켜온 이유를 설명한다. 새로운 영감을 찾는 논객과 정책 담당자를 위한 필독서."
저자가 노르웨이 어로 쓴 글을 영어로 옮겨 영국의 플루토 출판사에서 책이 나온 게 2011년 12월인데, 한국어 판이 1월에 나왔다! 번역가와 출판사의 재빠름이 놀랍다.
개인과 집단, 자유와 평등은 대립한다?
제목은 밋밋한데, 책이 말하는 바는 명쾌하다. 복지 국가는 자본과 노동의 권력 관계의 역사적 산물이며, 그 미래도 계급 투쟁의 권력 관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개인을 집단과 대립하는 존재로, 자유를 평등과 대립하는 가치로 보는" 자유주의자들은 틀렸으며, "자유와 평등은 같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복지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변화는 정부나 의회에 기대할 수 없기에 노동조합과 사회 운동이 앞장서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필수적이다.
복지 국가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계급 타협의 산물이며 '운동(movement)' 없는 복지 국가는 상상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이 책을 가로지른다. 복지 국가가 "공공 예산의 총액"을 늘리면 저절로 만들어지는, 관료와 정치 엘리트가 주도하고 집행하는 정책이나 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복지 국가는 "사회 제도와 공공 예산과 사회적 혜택의 총합"이 아니라 계급 투쟁과 권력 관계의 산물이라는 지적은 복지 국가가 "정책과 돈의 문제"라고 착각하는 한국의 정당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살짝 언급되는 정도지만, "엘리트의 반란", "부자들의 혁명"을 통해 복지 국가를 "학살"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신자유주의의 정치경제학적 핵심, 즉 노동가치설의 부정과 폐기에 대한 지적도 날카롭다.
"(부동산·금융·증권 시장의 투기꾼들이) 조선소의 용접공과 석유 산업의 엔지니어, 자동차 산업의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똑같이 가치를 창출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노동 운동이 처음 전개될 때 사람들은 학습 모임을 통해 사회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고 배웠다. 바로 노동이었다. 이른바 '불로소득'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 투기꾼들이 창출하는 가치는 없는 게 차라리 낫다."
사회주의 없었다면 복지 국가가 가능했을까?
▲ <지금 복지 국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아스비에른 발 지음, 남인복 옮김, 부글북스 펴냄). ⓒ부글북스 |
역사적으로 노동 운동의 원래 목표는 "착취와 억압이 없는 자유의 사회, 사회주의 사회"였다. 노동 운동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전 단계로서 복지 국가를 상정했던데 반해,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의 물결을 저지하려" 복지 국가에 타협했던 것이다.
외부적으로 자본가들이 보편적인 복지 국가를 받아들인 데에는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진영과의 체제 경쟁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국제연맹 산하 기관으로 노사정 3자 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가 출범한 때가 1919년이었다. 1917년 성공한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혁명의 물결이 세계 곳곳에 출렁이던 때였다. ILO가 출범하자마자 제정한 첫 국제 협약이 (21세기 한국에서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하루 8시간 노동" 협약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회주의 혁명의 압력 속에 국제 표준이 된 8시간 노동제처럼,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존재했기 때문에 복지 국가는 유럽을 넘어 미국에까지 그 흔적을 뚜렷이 남길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린 1989년을 기점으로 복지 국가 역시 타격을 받기 시작했음을 상기할 때, 이념과 현실로서의 사회주의가 복지 국가의 형성과 발달,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출발점,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
책을 읽다보면, 신자유주의라는 자본가들의 경제적 공세가 노동 계급에 대한 정치적 공격, 즉 노동조합에 대한 체계적 파괴로 격발되었음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미국 CIA와 칠레 군부의 음모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1973년 칠레의 군사 쿠데타가 출발점이었다. 우익 쿠데타 이후 노동 운동이 거세된 칠레는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운 관료, 지식인을 일컫는 '시카고학파'의 실험장으로 전락했다.
1981년 미국의 항공 관제사들이 벌인 파업에 대한 레이건 정부의 공격과 1984년 영국의 광업 구조 조정에 대항해 투쟁했던 광산노조에 대한 대처 정부의 공격이 국가 권력과 자본가들의 승리로 돌아감으로써 지금은 우리 귀에 익숙해진 세계화, 시장 근본주의, 금융화, 민영화, 규제 철폐, 구조 조정, 통화와 자본 통제의 포기, 수입 제한 철폐, 수출 지향 전략 채택,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노동 시장 유연화, 신자유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개별 국가와 세계 정치를 주무르게 되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나라에서 노동조합 조직률이 하락했고, 당연하게도 국민 총소득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졌다. 한국도 예외는 아닌데 1989년 19퍼센트에 육박했던 노동조합 조직률이 2010년에 1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고, 국민 소득에서 노동 소득이 차지하는 비중도 하락했다. 199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친 노동 시장 유연화는 노동자의 부를 자본가의 수중에 "재분배"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의 파괴와 '제3의 길'의 종언
복지 국가를 "학살"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파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정치적 규제의 철폐, 즉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 필연적이었다. "규제 철폐와 민영화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정치적 통제를 벗어나려는 흐름"과 세계무역기구(WTO)나 FTA처럼 "초국가적 합의와 제도를 통해 국민의 정치적 통제를 우회하려는 흐름"이 대표적이다.
복지 국가의 두 기둥인 노동 운동과 민주주의(사회 경제 활동에 대한 정치적 규제)가 퇴조하면서 자본 통제, 투자 정책, 조세 정책, 건강 정책, 교육 정책, 노동 조건의 결정권이 정치 체제로부터 시장, 즉 자본가들에게 넘어갔다.
지구적으로(globally) 권력 지형이 자본가들에게 유리하게 바뀌면서 노동과 자본 사이에 이뤄졌던 역사적인 계급 타협은 폐기되었다. 나라별로 차이는 있지만 서유럽에서 동남아시아까지 세계 곳곳에서 복지 제도는 약화되었고, 노동 계급의 연대를 가능케 했던 전국 수준의 단체 교섭은 붕괴했으며, 공장과 사무실에서 보장되던 노동자들의 권리는 악화되었다. 이러한 지구적 반(反) 혁명의 주인공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권을 맘껏 향유했던 독점 자본, 즉 초국적 기업들이었다.
이로서 모델로서의 사회적 대화와 사회적 파트너십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조절 자본주의(coordinated capitalism) 하에서 계급 타협을 관리하는 체제로서의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역할이 끝장난 것이다. 그 결과 "지난 20년 동안 규제 철폐와 민영화 그리고 공공 복지 서비스에 대한 공격에 동조했던"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이나 독일 사회민주당의 '새로운 중도'같은 사회민주주의 우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분배 관계가 아닌 생산 관계
그렇다면, 복지 국가는 실패한 것이고 폐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의 입장은 그 반대다. 복지 국가는 강화되어야 한다.
1990년대 이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복지 국가를 친(親) 시장의 방식으로 변형시키려 했다면, 지금부터의 복지 국가는 탈(脫) 시장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시장의 영역으로 넘어간 복지 제도들을 다시 시장 밖으로 끌어내야 하며, 규제를 받지 않아 고삐가 풀린 시장을 다시금 강력히 규제해야 한다. 나아가 금융 자본주의가 낳은 투기의 물결을 제거하기 위한 반격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현존하는) 사회 시스템의 대부분을 그대로 둔 가운데" 해결책을 찾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선거로 정부가 바뀌더라도 훼손되지 않도록 "평등을 사회의 제도적 구조 안에 녹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선거에서의 승리나 법제도의 개혁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본가가 장악하고 있는 생산 시스템, 즉 생산 관계의 영역을 노동자들이 탈환해야 한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 즉 경제 민주화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보기에 그 목표는 작업장 민주주의(workplace democracy)의 확립이어야 한다. 쉽게 말해, 공장과 사무실 밖에만 존재하는 민주주의를 공장과 사무실 안으로 확장해야 한다. "직장의 권력 관계를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권력을 얻으려는 투쟁에 실패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복지 국가는 '사회적 수선소'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 생산 시스템이 부의 최고 원천이며 또한 분배의 불평등의 원천이기도 하다. 경제 생활을 민주화할 길들을 가능한 한 많이 모색해야 한다. (…) 권력 관계가 형성되는 곳은 생산이지 소비가 아니다."
복지 국가 운동을 위한 사회적 동맹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 운동가답게 저자는 노동 운동의 활성화와 정치화를 제안한다.
"노동조합들이 더욱 독립적이고 공격적인 정치적 역할을 채택해야 한다. (…) (이는) 정당과 연결된 정치적 역할이어서는 안 되며, 사회적 투쟁에서 보다 포괄적인 임무를 떠안는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이어야 한다."
"복지 국가 운동"을 위해 농민, 학생, 여성, 은퇴자, 복지 수혜자들을 지지하는 다양한 조직이 참여하는 사회적 동맹을 노동조합 운동이 주도해야 한다. 저자에 따르면, 노르웨이에는 노동조합들이 선거 때 한 개 이상의 정당을 지지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선거 때 노동조합의 필요와 조합원들의 요구를 바탕으로 선거 공약을 정당들에게 제시하고, 그 이행을 약속하는 정당 혹은 정당들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을 통해 2005년 노동당이 주도하고 좌파 성향이 더 강한 사회주의좌파당이 참여하는 적록(赤綠) 연정이 출범할 수 있었다. 정권 교체로 우익 정권이 개악시켰던 노동법이 다시 개선되고, 우익의 사립학교법이 폐지되고, 철도 민영화가 중단되었다. 그리고 노르웨이 정부는 WTO에서 서비스 분야의 자유화 요구를 철회했다.
뻔한 이야기지만 대안은 기본에 있고, 현장에 있다. 우리가 일하며 살고 있는 현장에서 운동을 강화해야 한다. 일터와 지역 사회에서 운동을 활성화시켜야 하며, 전국 수준의 운동과 국제 연대도 바로 세워야 한다. 물론 여기서 운동은 노동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운동이다.
대안은 많다
답은 결국 사람에 있다. 자본가들은 사람들이 서로를 불신하고 경쟁하게 만들지만, 운동은 서로를 믿고 협력하게 만든다. 자본가들은 "모두가 부자가 되는 사회"를 약속하지만, 운동은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약속한다. 운동의 위기는 이데올로기의 위기이기도 한데, 이는 노동운동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는 사상적 토대를 상실했음을 뜻한다.
저자는 "위기와 사회의 퇴보에 맞선 투쟁에 영감을 불어넣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대안적인 사회 발전의 비전을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대안의 부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꼬집는다. 대안은 많다는 것이다.
"민영화의 대안은 민영화를 하지 않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의 대안은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관료주의와 위로부터의 통제에 대한 대안은 민주화와 아래로부터의 참여이다. 점점 심화되는 불평등과 빈곤에 대한 대안은 재분배와 누진세, 보편적인 무료 복지 혜택이다. 파괴적인 투기 경제에 대한 대안은 은행과 신용 기관의 국영화, 자본 통제, 의심스런 금융 상품들의 거래 금지다. 이런 식으로 리스트를 만든다면 (대안의 리스트는) 아마 끝이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무너져 내리는 지금 시점에서 대안 문제보다 시급한 문제는 "대중의 동원을 실현하고 또 이런 정책들의 실천에 필요한 수단들을 이용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을 갖추는 것인데, 저자가 보기에 그 출발은 "노동조합의 대중 동원 능력을 약화시킨" '사회적 대화', 즉 사회 협력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서 "(노동조합이) 동원 능력을 갖추고 (…) 투쟁에서 새로운 노선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나아가 노동 운동은 생산의 결과물, 즉 소비와 분배에만 초점을 맞추어온 기존의 노선을 권력 관계가 형성되고 결정되는 생산의 영역으로 옮겨야 한다. "권력 관계를 공격하지 않는 한, '살찐 고양이들'의 터무니없이 높은 연봉을 비난하고 절제를 호소해봐야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소비자로서의 이해관계"를 넘어 "생산자로서의 이해관계"를 따지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
생산 관계, 즉 현장(workplace)의 권력을 둘러싼 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는 지적은 복지 국가를 고민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각하게 고민할 대목이다. 일터의 권력 관계, 즉 작업장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 없는 복지 국가는 모래성 위에 쌓은 집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공공 재정의 총액", "정규직 임금의 몇 십 퍼센트"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지금의 복지 국가 논의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새로운 영감을 찾는 논객과 정책 담당자를 위한 필독서"
영어 판을 직접 구해보진 않았지만, 우리말로 옮긴 남인복의 번역도 훌륭하다. 하지만, 노동 문제에 대한 경험 부족이 주는 한계가 간혹 보인다. 법률 용어인 '근로자'를 고집하는 게 대표적이다. 근로 운동이나 근로조합이라 하지 않고 노동 운동과 노동조합이라고 하듯이 노동자로 고쳐 쓰는 게 맞다. 참고로 고용주(employer)의 법률 용어는 '사용자'다.
ILO의 핵심 목표인 '좋은 일자리(decent work)'도 '일다운 일'로 동어반복으로 번역되었다. 고용노동부는 '양질의 노동'이라고 한자말을 쓰는데, 나는 '좋은 일자리'라는 우리말 표현을 더 좋아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양질의 노동'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는 잘하는 것이라 본다.
복지 국가 연구의 대가인 에스핑-안데르센(Esping-Andersen)을 "에스핑과 안데르센"이라고 두 사람으로 나눠버린 것도 옥의 티다. 에스핑-안데르센은 1990년 나온 <복지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The Three Worlds of Welfare Capitalism)>에서 복지 국가를 △자유주의 모델, △국가-코포라티즘 모델, △사회민주주의 모델로 나눈 복지 국가 이론의 대가다.
물론 이런 사소한 번역상의 문제들이 책을 읽고 그 핵심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점은 글머리에서도 지적했지만 한국어 판 책 제목과 표지 편집이 너무 밋밋하다는 것이다. 좀 더 강한 표현의 제목에 강렬한 색깔의 표지였다면 어땠을까.
책 표지 뒷면에 붙은 우리말 설명은 책 내용 가운데 미국 복지 제도의 문제점을 그대로 따온 것인데, 책의 핵심을 전하는 내용이 아니라서 아쉽다. 플루토 출판사의 영어 판 뒷 표지에 실려 있는 네 개의 추천사를 그대로 실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그 중 책에서 언급되는 노동 운동 조직인 국제공공서비스노동조합연맹(PSI) 사무총장 페터 발도르프의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복지 국가의 미래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현재의 논쟁에 대한 중요한 기여. 발은 사회의 권력 관계가 어떻게 변해왔으며, 그것이 불평등을 확대시켜온 이유를 설명한다. 새로운 영감을 찾는 논객과 정책 담당자를 위한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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